칼 구스타프 융의 삶
칼 구스타프 융의 삶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스위스 콘스탄스 호숫가의 작은 마을 케스빌에서 쯔빙글리파에 속하는 개신교 목사 요한 폴 아킬레스 융과 그의 아네 에밀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부모의 갈등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그의 어린 시절은 그리 밝지 못했다. 특히 그가 세 살 때 어머니가 병원에 장기간 입원을 하면서 그는 더욱 큰 심리적 불안을 얻게 되었다.
열 살 되던 무렵 그는 자신의 내면에 또 하나의 사람이 있지 않은가 하는 내면적 분열을 심각하게 겪는 경험을 했다. 자신의 정체성에 혼돈이 생겼던 것이다. 이때 융은 자기 내면에서 또 다른 인격인 무의식을 발견하고 그의 진정한 모습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탐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적 분열을 감당할 수 없는 나이였기 때문에 그는 자신만의 비밀스런 제의적 형태 속에 빠져 들었다.
그는 대단히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융은 팔십 세가 넘은 나이에 자신이 유모차에 누워서 푸른 하늘과 황금의 햇빛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던 두 세 살의 기억을 떠올린다. 예민한 감수성 때문에, 소년시절에 많은 발작증세를 앓았다. 마음은 감수성의 크기만큼 세계에 민감하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고통스러운 느낌은 오히려 자신만의 내면의 세계로 발걸음을 인도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융에게 있어서 세계에 대한 고독은 내면에 대한 탐구로 전이되었다.
융이 청소년기에 접어드는 열 두 살 때 그가 학교에서 집에 오던 길에서 넘어져 머리를 크게 다치게 되었고, 어느 날 깊은 숲 속에 숨어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가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다. 아버지는 아들 융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많은 재산을 없앴고, 아들이 평생 돈을 벌 수 없게 된다면 슬픈 일이 될 것이라고 친구에게 말하였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아버지와 친구분의 대화를 엿들었지만, 융에게 있어서 그 대화는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융에게 있어서 그 대화는 현실에 대한 최초의 경험이 되었다. 융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아버지 서재로 달려가서 라틴어 문법책을 꺼내어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몇 번의 발작증세는 융에게 나타났고, 그러나 융은 굽히지 않고 발작을 극복하고 끈질기게 공부를 계속해 나갔다. 이후 융은 발작증세가 사라졌다. 이러한 경험은 자신을 철저하게 엄격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이후 융으로 하여금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데 일생을 바치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3. 정신적 의사로서의 활동
바젤대학의 학부를 졸업한 후 1900년 취리히대학 부속 부르크휠츨리 정신병원의 E.블로일러 교수 밑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하였고, 1904년경 정신분석의 유효성을 제일 먼저 인식하고 연상실험을 창시하여, S.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된 것을 입증하고, ‘콤플렉스’라 이름 붙였다. 이어 1906년 정신분열병의 증상을 이대하는 데에 정신분석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런 업적들에 의해 그는 프로이트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수제자로 인정되었다.